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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연화산 옥천사


고성 蓮華山 옥천사(玉泉寺)

  옥천사 대웅전  

▲ 옥천사 대웅전
옥천사 전나무 숲길과 계단
▶ 옥천사 독성각, 산령각

옥천사 독성각과 산령각


 


가을이 한참 절정을 쏟아내던 10월에 경남 고성(固城) 옥천사를 찾았다. 마산남부터
미널에서 통영행 직행버스를 타고 고성 북쪽 관문인 배둔에서 내려 개천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기다렸다. 차는 거의 1시간 마다 있는데, 마침 20분 뒤에 있다.
차를 기다리기 심심하여 정류장 화단에서 놀고 있는 잠자리를 희롱하며 노닥거렸는데, 화단에
서 놀던 잠자리는 5마리였다. 잡힌 잠자리는 자비를 베풀며 무조건 석방시켰으나 그들은 멀리
가지 않고 주변에서 놀다가 또 내 손에 잡힌다. 그렇게 잡고 풀어주는 것을 반복하여 20여 번
정도 잡았으니 1마리 당 거의 4~5번 나의 거친 손을 거쳐간 셈이다.

드디어 개천행 버스가 정류장에 바퀴를 들이자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잠자리 사냥을 그만두고
버스에 오른다. 버스 승객은 나를 빼고는 모두 노공(老公)들.. 내가 승객의 평균 연령치를 크
게 깎아준 셈이다.
버스는 외마디 부릉 소리를 배둔정류장에 남기며 1007번 지방도를 따라 마암면을 지나 개천면
으로 간다. 연화산의 품으로 바로 들어서는 듯 싶더니 좌연리에서 갑자기 우회전하여 교행 조
차도 불가능한 조그만 시골길을 거침없이 질주한다. 좌연리에서 바로 질러가면 옥천사 입구인
데 생각치도 못한 곳으로 강제 투어를 당하니 나도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버스는 그런 날 외
면하며 봉치리와 용안리 구석구석을 강제 구경을 시켜주고 나서야 다시 1007번 지방도로 복귀,
옥천사3거리에 나를 내려놓는다.


 


♠  연화산(蓮花山)의 품으로 들어서다

▲  옥천사 입구에서 바라본 연화산(528m)

옥천사3거리에서 다리를 건너면 본격적으로 연화산 나들이가 시작된다. 가을 추수의 기쁨을 누
린 전답과 시골집들, 옥천사 관광객을 겨낭한 찻집과 주막들을 반대 방향으로 흘려 보내며 15분
정도 살랑살랑 걸으면 계곡 건너로 주차장과 숙박촌이 자리한 연화산 집단시설지구가 나타난다.
공룡상이 있는 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들어서면 서쪽 가장자리에 공룡발자국화석이 있으니 그
것도 반드시 살펴보도록 하자.


▲  주차장 다리 앞에 놓인 귀여운 공룡상

▲  방생장(放生場) 비석과 돌탑들

주차장 입구에는 10여 기의 돌탑과 방생장 비석이 자리해 있다. 방생은 살려서 놓아준다는 의미
로 이곳이 계곡 옆이니 여기서 방생의식을 했던 모양인데, 그 비석 피부에는 붉은 글씨로 '崇禎
紀元後 四 辛酉 四月(숭정 기원후 4신유 4월)'이라 쓰여 있어 1861년 4월에 만든 것 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 의종(毅宗)의 연호로 1628년부터 명나라
가 풍비박산이 난 1644년까지 쓰였는데, 명이 사라진 이후에도 조선 조정과 사대부(士大夫)들은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명에 대한 아주 꼴사나운 꼴통 사대주의(事大主義)로 '숭정'이란 연호
는 무려 20세기 초까지 두고두고 우려먹었다. 그리고 '四 辛酉(4신유)'는 1628년 이후 4번째 신
유년이란 뜻으로 계산을 하면 1861년이 된다.


▲  옥천사계곡 공룡발자국 화석지

주차장 서쪽 계곡 암반에는 1억년 전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의 발자국 화석(化石)이 있다. 이들
은 용각류(Sauropoda, 잡식성 공룔) 공룡의 발자국들로 바위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얕게 패인 부
분이 그들의 발자국이다. 그리고 화석이 있는 암반 위쪽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얹힌 돌탑들이
널려 있다.


▲  공룡발자국 화석을 품은 계곡 암반

▲  공룡의 발자국화석
그들의 발자국 하나가 내 얼굴보다 크다. 여기서 뛰어 놀던 그들은 전설처럼
사라지고 그들의 발자국만 남아 아련하게 그 시절을 읊어줄 따름이다.

경남 고성은 스스로 공룡나라를 칭하며 공룡을 고을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고성은 우리나라 최
초로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곳으로 고을 전역에서 발견된 것만 5,000여 개에 달해 미국 콜
로라도, 아르헨티나 서부해안과 더불어 세계3대 공룡발자국 화석 산지(産地)로 손꼽힌다. 게다
가 바닷가에 있는 상족암은 공룡 화석의 성지(聖地)로 고성공룡박물관까지 들어서 있다. 이렇게
공룡의 흔적이 부지기수로 많으니 고성이 공룡나라를 칭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  인간의 상상으로 깜찍하게 포장된 공룡

공룡발자국화석지 옆에는 깜찍한 공룡상이 있다. 그들은 우리와 마주칠 일도 전혀 없는 먼 옛날
의 존재로 가볍게들 생각하고 있지만 만약 인간과 공룡이 공존을 한다면 분명 호환마마 그 이상
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렇게까지 귀엽게 만들지도 않았겠지. <공룡(恐龍)의 공(恐)은 매우
두려워한다는 뜻임>


▲  옥천소류지(沼溜地)

▲  매표소 쪽에서 바라본 옥천소류지

집단시설지구 주차장에서 5분 정도 오르면 옥천사계곡물을 모은 저수지가 나온다. 그의 명칭은
옥천소류지로 연화산이 베푼 계곡물이 옥천사를 끼고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끝없는
대장정을 준비한다. 늦가을의 절정을 누리며 처절한 아름다움을 비치는 나무들과 알을 품은 어
미새처럼 푸근하기 그지없는 연화산 산줄기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몸단장에
여념이 없고,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첩첩한 산중에 안긴 비밀의 호수처럼 신비롭
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옥천소류지의 경치에 취한 것도 잠시~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가 내 흥을 깨뜨리며 발길을 막는
다. 바로 옥천사매표소이다. 매표소에는 아저씨 1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입장료를 보니 무려
1,300원(학생은 1,000원)이다. 입장료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고성읍 무량리(우리 집안 고향임)
가 집안 고향이라 들이대면서 슬쩍 대학생 할인 여부를 물으니 고향과 본관이 고성이란 말에 아
저씨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오늘은 평일이고 하니 그냥 들어가라고 그런다. 뜻밖에 호의에 감
사의 뜻을 표하고 별탈없이 매표소를 통과했다.


▲  옥천사 일주문(一柱門)

매표소를 지나면 옥천사 주차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오르면 옥천사의 관문인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 문은 1984년에 지어진 것으로 현판에는 '연화산 옥천사'라 쓰여 이곳의 정체를
밝혀주며, 문을 들어서면 아름답기 그지 없는 옥천사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  가는 길목에 중생들의 목을 축여주는 샘터도 있다.

옥천사 숲길은 하늘을 가리며 솟아난 늘씬한 나무들로 거대한 수해(樹海)를 이룬다. 숲 밖은 훤
한 대낮이지만 숲 안은 오히려 그늘지게 어두워 따사로운 햇빛마저 우걱우걱 삼켜버린다. 산사(
山寺)로 가는 숲길 치고 아름답지 않은 길은 거의 없겠지만 옥천사 숲길은 그중에서도 천하 으
뜸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움이 깊다. 길을 가다가 선녀 누님이 툭 튀어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나무들이 베푼 선선한 산바람에 번뇌는 날려가지 않으려고 발악을 한다. 허나 결국은 날려간 모
양이다. 마음이 가뿐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멀리 날라가지는 못하고 매표소 밖 소류지에서 물
놀이를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번뇌의 무게가 참 무겁긴 무거운 모양이다.

숲길 중간에는 샘터가 있다. 연화산이 중생들의 갈증을 우려하여 베푼 옥계수로 석조(石槽)에는
늘 물로 가득하다.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마시니 몸 속의 온갖 때가 싹 가신 듯 마음이 시원
하다. 샘터를 지나면 길 왼쪽에 사적비와 부도군이 있으며, 부도군에는 조선 후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승탑(부도)들이 시간을 초월하며 어깨를 나란히 한다.


▲  옥천사 사적비와 부도군(浮屠群)
옥천사의 내력이 적힌 사적비와 옥천사와 인연이 깊은 승려의 승탑(僧塔)이
숲속에 터를 닦았다.


 


♠  옥천사 입문 (천왕문, 범종루 주변)

▲  천왕문(天王門)

일주문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절의 2번 째 문인 천왕문이 마중한다. 이 문은 1989년에 만든 것
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문 안에는 천왕문의 주인이자 부처를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이 눈을 부아리고 중생을 검문하며, 문 앞에는 속인(俗人)들이 끌고 온 수레들이
뒷꽁무니를 들이밀며 바퀴를 접고 쉬고 있다.

▲  사천왕(四天王)의 위엄
왼쪽부터 보탑(寶塔)을 들고 선 다문천왕(多聞天王), 비파 연주의 달인 지국천왕(持國天王),
칼의 달인 증장천왕(增長天王), 철쇄(鐵鎖) 비슷한 것을 든 광목천왕(廣目天王)

▲  증장천왕 발에 짓밟힌 악귀(惡鬼)

사천왕은 부처 및 불법을 지키는 경호대장에 걸맞게 대단한 외모과 풍채를 자랑한다. 눈초리가
매섭긴 하지만 쳐다보면 볼 수록 정이 드는 밉지 않은 얼굴이다. 허나 사천왕에 밟힌 악귀들은
사정이 그렇지를 못해 한결같이 인상들이 더러운데 그들 눈빛은 원망과 살기로 가득해 보인다.


▲  붉은 벽돌담에 둘러싸인 비각(碑閣)

        ◀  비각에 안긴 선경비(善敬碑)
천왕문을 들어서면 붉은 벽돌 담장에 둘러싸인
조그만 비각을 만나게 된다. 비각 안에는 지붕
돌을 얹힌 비석이 안겨져 있는데, 이 비는 옥천
사에 시주를 많이 한 어느 사대부를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비문 내용은 '贈 戶曹判書 安公
善敬碑'라 쓰여 있어 나중에 호조판서로 추증(
追贈)된 안씨 성을 가진 사대부가 비석의 주인
임을 알 수 있는데, 비석이 세워진 것은 1922년
이다.

비각 앞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데, 그렇
다고 선경비를 위해 세워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 자리는 원래 제왕의 수복(壽福)을 빌던 축성
전(祝聖殿)이 있던 곳이라 그 앞은 무조건 말에
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를 세운 것이다.


▲  축성전터를 지키는 하마비의 위엄
지체 높은 고관대작(高官大爵) 마저 꼼짝 못하게 만든 하마비 3글자에
자못 위엄이 서려 보인다.

◀  경내를 목전에 둔 전나무 숲길

비각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길 좌우로 늘씬하게
솟은 전나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룬다. 비록
10m 남짓의 짧은 거리지만 소소하게 멋을 풍기
며 옥천사의 아름다움을 수식하는데 일조한다.
가을도 반하여 머무는 그 숲길 바닥에는 한 시
절 폼나게 살다간 낙엽들이 깔려 알록달록 카페
트를 이룬다. 귀를 접고 누운 낙엽을 보면서 올
해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실감나게 하니
세월의 자비 없는 조급함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그런 숲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자방루 뜨락이
나온다.


▲  범종각(梵鍾閣)

전나무숲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연병장처럼
넓은 자방루 뜨락이 펼쳐진다. 뜨락 왼쪽에는
범종각이 자리해 있는데, 범종(梵鍾)과 법고(法
鼓), 운판(雲版), 목어(木魚) 등 사물(四物)이
담겨져 있다. 범종 같은 경우는 1776년에 주조
된 대종(大鐘)이 있었으나 현재는 보장각에 있
으며, 1987년 재일교포 박명호가 시주하여 만든
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박명호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하는데 당
시의 추억을 잊지 못해 거금을 시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물 외에도 조선 때 싸리나무로 만든
큰 구시가 있는데, 이것은 큰 불사나 법회 때
밥이나 물을 담던 커다란 나무 통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옥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자방루 뜨락 좌측에 자리한 샘터


※ 연화산에 안긴 고성 제일의 고찰, 옥천사(玉泉寺) - 경남 지방기념물 140호
고성 제일의 명산(名山)인 연화산(蓮花山) 북쪽 자락에 고성 사찰의 갑(甲)인 옥천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이 절은 676년(문무왕 15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10년에 걸친 당나
라 유학생활을 마치고 670년에 귀국하여 화엄종(華嚴宗)을 널리 알리고자 영주 부석사(浮石寺)
를 시작으로 좁아 터진 신라(新羅) 땅에 10개의 화엄종 사찰을 지었는데, 옥천사는 그중의 하나
로 세워졌다고 한다. 절의 이름은 지금도 이곳의 명물로 꼽히는 옥천(玉泉)이란 샘에서 유래되
었다고 하며, 과연 의상이 창건했는지는 속시원히 입증할 수는 없지만 최치원(崔致遠)이 하동
쌍계사(雙磎寺)에 남긴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47호)에 '쌍계사는 본래 절
이름을 옥천사라 했으나 근처에 옥천사란 절이 있어 헌강왕(憲康王)이 쌍계사라 제액(題額)을
내렸다'
는 문구가 있어 옥천사가 그 이전부터 숨 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라 말기인 898년에는 창원 봉림사(鳳林寺)를 세운 진경국사(眞鏡國師) 심희(審希)가 낭림선사
(朗林禪師)와 함께 중창을 벌였는데, 이때 크게 가람이 확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때는 964년(광종 15년)에 혜거국사(惠居國師)가 혼응(混應)과 더불어 3번째 중창을 벌였고,
1110년(예종 5년) 혜은(慧隱)이 쇠퇴한 절을 다시 일으키니 이것이 4번째 중창이다. 그리고 예
종 시절에는 묘응(妙應)이 이곳에서 천태종(天台宗)을 강의했다고 한다. 1237년 최씨정권이 대
장경(大藏經) 불사를 위해 진주에 대장도감 분사(大藏都監 分司)를 두었는데, 옥천사 보융대사(
普融大師)가 일연대사(一然大師)와 함께 팔만대장경 교정 작업을 벌였으며, 그 공로로 5번째 중
창이 이루어졌다. 1371년(공민왕 20년) 지운(智雲)과 원오(圓悟)가 6번째 중창을 했다.

1392년 천하가 바뀌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옥천사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했다. 1592
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천사 승려들은 의승군(義僧軍)을 조직하여 왜군(倭軍)과 싸웠으나 1597
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군의 공격으로 절 전체가 파괴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 이후 1640년 학명(學明)이 절 아래 대둔마을에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
타나 웅장한 절터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학명은 이튿날 꿈 속에서 갔던 그
곳을 더듬어 찾으니 글쎄 그때 본 거대한 절터가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자리도
일품이었다. 그래서 친분이 있던 의오(義悟)와 함께 중창불사를 벌이기로 하고 1644년에 우선
동상당(東上堂)이란 초가를 짓고 이듬해 심검당을 세웠다. 허나 재정이 넉넉치 못해 1654년에
겨우 법당을 지었고, 1664년에 정문을 세워 7번째 중창을 마무리 지었다.

1677년 묘욱(妙旭)이 법화회(法華會)를 개설하여 향적전, 만월당을 짓고, 1680년 인근에 청련암
(靑蓮庵)과 백련암(白蓮庵) 등의 암자를 세웠다. 1764년에는 자방루를 짓고 그 앞에 뜨락을 넓
게 닦았는데, 여기서 승병 훈련을 했다. 조선 정부는 승군(僧軍)을 부리고자 바다와 가까운 절
에 의무적으로 승병을 두게 했는데, 영조 시절 옥천사 승군은 3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절 규모는 요사 5동, 산내암자 7개였으며, 물레방아가 12개나 있을 정도로 크게 흥했다.
이때가 8차 중창이었다.

달은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1800년(정조 24년) 나라에 종이를 바치는 어람지 진상사찰(御覽紙
進上寺刹)로 선정되었다. 병역과 각가지 부역(負役)도 힘든데 거기에 종이까지 만들어야 되니
그 부담이 실로 상당했을 것이라 심한 부역을 이기지 못한 승려들이 자꾸 도망을 치면서 절이
크게 기울게 된다. 그래서 1842년 승군의 정원을 170명에서 100명으로 줄이고 종이 물량도 크게
감량해 주었으나 여전히 감당이 되지 않아 1880년에는 겨우 10여 명만 남았다고 한다.
1863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인 신관호(申觀浩)가 절을 방문해 '연화옥천(蓮花玉泉)'
이란 글을 남겼는데, 이때 주지인 농성(聾醒)이 어람지 진상사찰에서 빼줄 것을 호소했다. 그
말이 옳다 여긴 신관호는 바로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리면서 종이 부역에서 해방되었다.

옥천사는 19세기에 진주와 고성 지역 사대부(士大夫)와 여러 관청에서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지배층과 관(官)과 한통속이라 백성들은 생각을 했던 듯 싶다. 백성들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온갖 수탈로 허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옥천사는 종이 부역과 승병 군역이 있을 뿐,
그런데로 지원을 받으며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862년 진주민란(晉州民亂)이 터지자 농
민들은 절로 몰려와 경내 외곽의 건물과 대종을 파괴했으며, 1888년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도 농민들이 다시 몰려가 많은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에 뚜껑이 열린 용운대사(龍雲大師)가
정면으로 나서
'이 절에는 전하(殿下)의 수복을 비는 축성전이 있소. 더 이상 불을 지르면 당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삼족을 멸할 것이오!!'
호통을 치니 이에 간이 쫄깃해진 농민들은 겁을 먹고 줄행랑을 쳤
다. 그 덕분에 대웅전, 자방루는 온전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어쨌든 사대부와 관의 지원으로 적묵당과 탐진당을 중수했고, 힘들다고 도망친 승려를 소환하면
서 예전의 명성을 조금씩 되찾기 시작했다. 1890년에는 조정이 전국에 교지(敎旨)를 보내 왕실
을 위해 기도를 올리라고 지시했다. 이에 경상도관찰사이자 진주목사인 박규희(朴珪熙)가 개인
자금을 털어 옥천사에 왕실의 안녕을 비는 건물을 지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흐뭇해하며
축성전이란 사액을 내렸으며, 명부전과 나한전, 칠성각을 끊임없이 중건하면서 이른바 9번째 중
창은 마무리되었다.
이 당시 옥천사 소유 전답은 800여 마지기로 인근 농민들에게 소작(小作)을 주어 5:5 비율로 받
아 매년 1,000석의 수입을 챙겼다. 또한 산을 개간해 560정보를 전답으로 만들었으며, 세곡 수
입을 바탕으로 계속 전답을 불렸고, 승려 수도 나날이 늘어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1911년 왜정(倭政)이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고 전국 31본산(本山)을 정할 때 옥천사가 그 하
나로 지목되었다. 허나 당시 주지인 서응대사<瑞應大師, 채서응(蔡瑞應)>이 서울 주지회의에 참
석하여, 대본산 지정을 거절했다. 그로 인해 옥천사 승려들의 칭송이 대단했다고 한다. 1920년
경에는 진주에 포교당을 만들어 연화사(蓮花寺)라 하였다.

옥천사는 왜국으로 승려 15명을 유학보내기도 했으며, 이들은 장차 절 주지와 교육계로 진출했
다. 그리고 잠시나마 옥천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고, 상해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는 등 나라의
독립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또한 절은 통도사의 말사(末寺)이지만 워낙 파워가 대단하여 통도사
에서 주지를 파견하지도 못했다. 옥천사 자체에서 중론으로 주지를 선출하여 통도사에 승인을
요구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1950년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자 사찰답 800여 지기가 소작인들에게 죄다 넘어갔다. 그
로 인해 절은 졸지에 거지가 되고 운영에 큰 위기를 맞았다. 다른 절은 약간의 불량답(佛糧畓)
이라도 건졌으나 옥천사는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허나 연화산 주변 565ha의 산림을
가지고 있어 빈털털이는 그나마 면했다.

근래에 이르러 청담(淸潭)이 불교정화와 신도 교화운동을 벌이면서 전답을 잃어 방황하던 절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렸으며, 1984년 일주문을, 1987년 사적비, 1999년 유물전시관과 축성전을 지
으면서 지금에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옥천사 칠성각

▲  옥천사 보장각(성보박물관)

경내에는 대웅전과 팔상전, 자방루, 조사전, 유물전시관 등 20동에 가까운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으며, 청련암과 백련암, 연대암 등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외에 고성읍내와 하동에 보광
사, 낙서암 등의 포교원을 운영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 495호로 지정된 청동금고(靑銅金鼓)와 보물 1693호인 지장보살도 및 시
왕도 등 국가지정문화재 2점과 대웅전과 자방루, 향로, 대종, 명부전 등 지방문화재 7점을 간직
하여 고색의 짙은 향기와 절의 장대한 역사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또한 절 전체는 경남 지방기
념물 140호
로 지정되었다.

옥천사는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연화산의 북쪽 자락에 포근히 안겨있으며, 산세가
완만하고 숲이 울창해 경남 남부의 경승지로 명성이 높다. 특히 알록달록 물감이 완연히 번진
가을은 그 백미이다. 첩첩한 산주름에 묻혀있어 고요하기 그지없으며 풍경소리와 산바람 소리,
산새의 지저귐, 범종 소리가 그 고요를 가끔 깨뜨리는 게 전부이다.

절을 품은 연화산은 복분자딸기와 송이버섯이 유명하며, 우리나라 100대 명산의 하나이다. 연화
산 일대는 경남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연화8경의 절경을 간직하고 있다. 

※ 연화산 옥천사 찾아가기 (2013년 11월 기준)
① 고성, 배둔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고성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서부터미널과 마산남부터미널에서 배둔 경유 고성행 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② 진주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진주행 고속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 대전동부터미널, 부산서부터미널, 대구서부정류장에서 진주행 직행버스가 이용
③ 고성/배둔/진주에서 옥천사3거리까지 (옥천사3거리에서 도보 35분)
* 고성터미널과 배둔에서 개천행 군내/완행버스(1일 10여 회)를 타고 옥천사3거리 하차
* 진주시외터미널에서 옥천사3거리 경유 배둔, 고성 방면 완행버스가 1일 11회 다닌다.
④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까지 진입 가능)
* 대전~통영고속도로 → 연화산나들목을 나와 우회전 → 영오 → 개천 → 옥천사3거리 → 옥천
  사 주차장

★ 옥천사 관람정보 (2013년 11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1,300원 / 학생,군인 1,000원 (20인 이상 단체 800원) / 어린이 700원 (단체
  600원)
* 옥천사는 휴식형과 체험형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한다. 휴식형은 최대 3박4일까지
  머물 수 있으며, 체험형은 매월 2,4주 주말에 1박 2일로 진행된다. 체험형 참가비는 성인 5만
  원, 초중고 4만원이며, 세면도구와 수건, 운동화 등을 지참해야 된다.
  자세한 문의는 옥천사 종무소(☎ 055-672-0100)나 홈페이지 참조
* 옥천사에서 연화산 정상까지 2시간 정도 걸린다.
* 소재지 -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408 (연화산1로 471-9) <☎ 055-672-0100>
* 옥천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옥천사 승군들이 사용한 언월도(偃月刀)


 


♠  옥천사 둘러보기 (자방루, 대웅전 주변)

▲  옥천사 건물의 갑(甲)인 자방루(慈芳樓)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3호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으로 가려면 자방루의 옆구리를 싫든 좋든 거쳐야 된다. 옥천사의 속살을
속세에 드러내기가 싫었던지 대웅전 주변을 꽁꽁 가리고 있어 바깥에서는 내부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당당한 모습을 지닌 자방루는 1764년에 지어졌다. 1888년 농성이 중건하
고 1984년에 보수를 벌였는데, 이 건물은 승장(僧將)이 승군을 지휘/통제하던 곳으로 최대 340
명까지 담을 수 있다. 훈련 외에는 불교 강의나 행사 장소로 쓰였으며, 너른 앞뜨락에서는 승병
들이 훈련을 하거나 군사 사열을 받았다.

건물 내부에는 1888년에 그려진 비천상(飛天像)과 비룡상(飛龍像)을 비롯해 새 그림 40여 점이
내부를 수식하며, 자방루란 이름은 꽃다운 향기가 점점 불어난다는 뜻으로 불도를 닦는 누각이
란 뜻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보장각 제외)로 옥천사의 오랜 명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  단청으로 화사한 자방루 내부

▲  자방루 대들보에 걸린 현판

자방루는 대웅전 방향만 개방된 형태이고 천왕문 방향은 문을 열고 닫는 형태이다. 내부는 누마
루로 바닥을 짰고 단일부재인 대들보에 기둥이 없는 통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단순하면서도 간
결한 분위기를 준다. 대들보에는 비룡상과 비천상이 그려져 있으며, 문 위쪽에는 화려한 색채의
그림들이 있으니 잘 살펴보도록 하자.
자방루 현판은 영조 시절 이조참판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조명채(曹命采, 1700~1764)가 옥천
사에 들렸을 때 쓴 것이다.


▲  자방루 옆문에서 만난 사마귀의 위엄
흑자(黑子, 사마귀)공이 옥천사에는 어인 일로 행차했을까? 사마귀의 위엄 돋는
행차 앞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  옥천사 대웅전(大雄殿)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32호

자방루 옆구리를 지나면 대웅전이 바로 모습을 비춘다. 장대한 규모의 자방루와 드넓은 자방루
뜨락에 비해 대웅전 주변은 정말 협소하다. 뜨락 좌우로 적묵당과 탐진당이 꽉차게 들어앉아 있
어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 4동이 뜨락을 빈틈 없이 포위한 형태이다.

높은 기단 위에 높직히 들어앉아 법당(法堂)의 위엄을 드러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옥천사의 중심지이다. 1649년에 중창되었으며, 1677년 묘욱(妙旭)이 개
수하고 1736년 보수를 했으나 건물이 너무 낡아 1864년 용운대사가 새롭게 만들었다. 대웅전 현
판은 영조 시절 동국진체풍(東國眞體風)의 대가인 동화사(桐華寺) 기성대사(箕城大師)의 글씨라
고 전하며, 대웅전 계단 좌우에는 2쌍의 돌기둥인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서 있는데 이는 괘불이
나 깃발을 거는 용도로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 기단을 이루고 있는 돌에는 푸른 이끼가 자욱히
끼어 중후한 멋을 선보인다.


▲  조선 영조 시절 기성대사가 쓴 대웅전 현판의 위엄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듯 활력이 넘쳐 보인다.

▲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3존불
온후한 표정의 석가불이 수려한 보관(寶冠)을 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  대웅전 외벽에 그려진 벽화 ▼
부처나 관음보살 이야기 대신 꽃과 화병, 채소, 붓 등이 그려져 있다.
무슨 사연이 깃들여진 것일까? 절의 주요 고객이던 사대부를 위한 그림일까?

▲  적묵당(寂默堂)
1764년에 세워진 'ㅁ'구조의 건물로 고참
승려들이 머물던 큰방이었다. 현재는 재를
올리거나 공부를  하는 공간으로 쓰이며,
2006년에 해체보수했다.

▲  탐진당(探眞堂)
1754년에 세워진 건물로 신참 승려들이 머물던
방이었다. 지금은 종무소 및 영가(靈駕)를
봉안한 공간으로 쓰인다.


 


♠  옥천사 둘러보기 (팔상전, 명부전, 조사전 주변)

▲  옥천사 팔상전(八相殿)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팔상전은 부처의 일생을 담은 8폭의 그림을 담은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90년(고종 27년)에 세워진 것으로 8상 탱화는 도난을 방지하고자 보장각에 따로 보관
하고 있으며, 탱화의 사진을 대신 걸어두었다.


▲  옥천사 명부전(冥府殿) - 경남 문화재자료 146호

대웅전 좌측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한 명부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730년에 지어졌으며, 1895년에 중수했다. 명부전 옆에
는 흙과 기와로 빚은 정겨운 옛 굴뚝이 나란히 자리하여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왕년을 그리워
한다.


▲  명부전 불단에는 포근하고 귀여운 인상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시립(侍立)해 있다.

▲  옥천사 조사전(祖師殿)

경내에서 가장 뒤쪽에 자리한 조사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절을 창건했다는 의상대사의 진영
(眞影)과 서응대사<瑞應大師, 채서응(蔡瑞應)>, 청담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  조사전 중앙을 장식하는 의상대사의
진영

           ◀  옥천사 나한전(羅漢殿)
대웅전 뒷통수에 자리한 나한전은 16나한(羅漢)
의 거처로 불단에는 정조 시절에 조성된 석가3
존불(석가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이 봉안되
어 있다.
나한전은 1895년에 지어진 것으로 16나한 가운
데 9상은 조선 후기 것이고, 7상은 근래에 나한
을 손질하면서 새롭게 붙여 넣었다. 이곳 나한
은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  옥천사 칠성각(七星閣)

조사전 밑에 자리한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
다. 내부에는 1981년에 만든 칠성탱화가 걸려있다.


▲  조촐한 모습의 독성각(獨聖閣)과 산령각(山靈閣)

명부전 뒤에는 눈에 넣어도 적당할 정도로 조그만 모습의 독성각과 산령각이 나란히 자리해 있
다. 이들은 서로 생김새도 비슷하여 마치 쌍둥이 같다.
왼쪽에 자리한 독성각은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1897년에 지어졌으며, 사람 1명이
들어가 앉으면 그냥 꽉 차버린다. 우측 산령각은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역시 1897년에 세워
졌는데, 독성각보다도 작아서 사람이 아예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천상 밖에서 예를 올려야
된다. 두 건물 모두 120년 남짓의 건물이지만 너무 노후해 보여 300년 이상은 되어 보인다.


▲  시원하게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독성도(獨聖圖)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도(山神圖)


▲  옥천각(玉泉閣)

팔상전 뒤쪽에는 옥천각이란 조촐한 건물이 있는데, 바로 그 안 옥천사의 명물인 옥천(玉泉)이
담겨져 있다. 옥천은 물이 솟는 샘터로 절에서는 그를 위해 옥천각이란 수각(水閣)까지 씌웠는
데, 이 샘터는 옥천사 창건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며, 옥천사란 이름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 물과 함께 일정량의 쌀이 흘러나와 그걸로 공양을 했다고 하며, 어느 욕심꾸러기 승
려가 더 많은 쌀을 취하고자 샘을 파헤쳤는데, 샘이 크게 노해 쌀은 커녕 물도 끊겼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승려가 지극정성으로 잘못했다고 기도를 올리며 샘을 달래니 샘도 화를 풀었는지
연꽃 1송이가 활짝 피어나면서 물이 콸콸 솟아나 만병통치의 약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성 지역에 이름난 약수로 왕년에는 샘물에서 목욕을 하는 중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
며, 지금은 목욕은 못하고 물만 떠 마실 수 있다.

산사에서 마시는 샘물은 맛이 다 고만고만하지만 부산 미륵사(彌勒寺)와 고성 옥천사의 물맛은
신선이 마시는 물처럼 뭔가 특별해 보인다. 물을 마셔보니 자연이 내린 특별한 양념이 담긴 듯
맛이 달콤하다. 물을 3번이나 떠 마시고, 가져온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집에서도 두고두고 마
셨다.


▲  옥천사의 명물, 옥천(玉泉)
둥그렇게 파인 샘에서 연화산이 베푼 옥계수가 쉬지 않고 솟구친다.

▲  청담대사 승탑

▲  청담대사 사리탑비

경내에서 보장각으로 가는 길목에 옥천사에서 출가한 근대 불교의 1인자 청담대사의 승탑과 탑
비가 있다. 옥천사에서도 가장 특별한 존재라 경내에 그의 사후 공간을 만들어 두고두고 그를
기린다.
하얀 피부의 수려한 조각을 자랑하는 승탑에는 그의 사리가 담겨져 있으며, 그 옆에 청담의 일
대기를 담은 탑비가 있다. 입에 보주(寶珠)를 물고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린 귀부에 생동감이 넘
쳐 보인다.


 


♠  옥천사의 보물이 담긴 보장각(寶藏閣)

경내 북쪽에는 2층 규모의 보장각이 늠름한 모습을 뽐내며 자리해 있다. 보장각은 옥천사의 귀
한 보물을 간직한 꿀단지로 오래된 큰 절에 흔히 있는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이다. 옥천사 제
일의 보물인 청동금고(임자명반자)와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를 비롯하여 청동향로, 신중탱화, 대
종 등의 불화와 고문서, 불상, 여러 불기(佛器) 등 200여 점의 유물이 소중히 담겨져 있다. 이
중 법고(法鼓)와 시왕탱화 등 119점은 '옥천사소장품'이란 이름으로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99호
로 지정되었다.

보장각은 1999년 정부의 지원으로 세워졌으며, 입장료는 없다. (어차피 옥천사 입장료에 포함됨
) 매주 월요일은 문을 걸고 쉬지만 1층 정도는 상황에 따라 요령껏 관람이 가능하다. (2층은 문
이 잠김) 내가 갔을 때는 공교롭게도 박물관의 공통적인 휴일인 월요일이었다. 1층은 다행히 문
이 열려있어 구경은 했지만 2층은 불이 꺼져 있고 전시실 문도 굳게 잠겨져 들어가지도 못했다.
전시실은 사진 촬영이 통제되어 있으나 요령껏 1층 유물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허나 태반이 흐
리거나 흔들리게 나와서 건질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그나마 괜찮게 나온 것 일부만 간단히 소개
한다.


▲  1904년에 제작된 모연문(募緣文)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99호

▲  비변사절목(備邊司節目)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99호

▲  옥천사 청동금고(靑銅金鼓) - 보물 495호

옥천사 보장각 1층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임자명반자(壬子銘飯子)라 불리는 청동금고가 아닐까
싶다. 청동금고는 말그대로 청동으로 만든 쇠북으로 1252년(고려 고종 39년)에 제작된 고려 후
기 금고(쇠북)이다. 다른 말로 반자(飯子)라고도 하나 잘 쓰이지는 않는다. 표면지름 55cm, 측
면너비 14cm로 전면에 굵은 융기선(隆起線)으로 4줄의 동심원(同心圓)을 두르고 후면은 비웠다.

금고는 불교의식 때 사용하는 것으로 금고 측면에는 187자에 이르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
데, 첫머리에 '高麗二十三王 環甲之年 壬子四月十二日 在於京師工人家 中鑄成智異山 安養社之飯
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1252년 고려 황제인 고종(高宗)의 환갑을 기념하여 만들었음을 알
려준다. 만든 이후 지리산에 있던 안양사(安養社)에 두었는데, 그런 금고가 어찌 옥천사까지 흘
러들어 왔는지는 전하는 바가 없다.
금고 제작자인 공인별장(工人別將) 한중서(韓仲敍)는 내소사범종(來蘇寺梵鍾) 등 여러 점의 유
물을 남긴 인물로 고려 후기에 뛰어났던 장인으로 여겨진다. 귀족과 승려들이 발원한 내용이 기
록되어 있고, 안양사의 사(社)라는 이름에서 고려 말에 유행했던 신앙결사(信仰結社)의 한 형태
로 조성된 작품으로 보인다. 이제는 760년이 넘은 노구(老軀)로 현역에서 은퇴하여 이렇게 박물
관의 한 부분을 장식한다.


▲  옥천사 장대청안목책(將大廳案目冊) - 1857년 작

▲  다라니경목판 - 19세기 작

▲  옥천사 인장(印章)

 ◀  옥천사 향로(香爐)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9호

옥천사 향로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입 안쪽에는 점선으로 '
의령수도사(宜寧修道寺)'란 글씨가 있어 그곳에
서 왔음을 알려주며, 가경(嘉慶) 21년, 즉 1816
년(순조 16년)에 보수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때 향로 받침을 새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 향로는 무늬를 먼저 새긴 다음 은을 입히는
방법으로 문양을 새겼으며, 표충사(表忠寺) 은
입사 향로와 같은 수법을 보여주는 괜찮은 작품
이다.

보장각 1층을 둘러보고 2층으로 올랐다. 2층은 불이 꺼져 있고 전시실 문은 굳게 입을 봉했다.
문 옆에는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0호로 지정된 대종(大鐘)이 있으나 사진에 담지는 않고 괜히
2층까지 설치다가 무슨 소리를 들을 듯 싶어서 꼬랑지를 내리고 바로 철수했다. 대종은 1701년
에 조성된 것이다.

◀  옥천사에서 누린 차1잔의 여유

옥천사를 살피고 가까운 곳에 있는 청련암(靑蓮庵)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핸드폰이 밥기
운이 다되었다며 졸도를 해버렸다. 실신한 핸드폰을 계속 흔들어 깨웠으나 깨기가 무섭게 실신
을 한다. 그래서 청련암종무소에 도움을 청했으나 아무도 없어서 서둘러 옥천사로 내려와 그곳
종무소에 부탁을 넣었지만 충전기가 없다고 그런다. 요즘 무척 잉여로운 몸이라 연락올 때도 거
의 없지만 요즘 세상에 핸드폰이 없으면 그것만큼 허전한 것이 없다.
이거 어찌해야 되나 궁리하다가 문득 보장각 지하층(말이 지하지 지상임)에 있는 찻집을 생각하
고 거기로 갔다. 찻집에는 주인 아줌마와 그의 귀여운 어린 딸이 있었는데, 주인 아지매에게 충
전을 부탁하니 마침 충전기가 있어서 해주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하고 충전이 되는
(20분 정도) 동안 찻집에서 두 발을 쉬었다. 그런데 그냥 앉아 있으려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장 저렴한 2,000원짜리 차 1잔을 주문했다. (그때 마신 차 이름은 기억이 안남) 여태까지 찻
집에서 나홀로 차를 마신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홀로 차 1잔의 여유를 즐기게 된 것이다. 

차(茶)를 주문하니 잠시 뒤 잣이 띄워진 차와 에이스 과자가 담긴 그릇이 앞에 차려진다. 차의
향을 음미하며 산주름에 묻힌 산사에서 오랜만에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린다. 차에는 떡이
찰떡궁합이지만 떡 대신 과자가 나왔으니 다소 조화가 떨어진다. 에이스 과자에는 딱 커피가 어
울리는데 말이다. 에이스는 옛날에 많이 먹었던 과자라 감회가 새롭다.

과자를 먹으며 차를 마시는 동안 30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누구와 같이 왔으면 2시간도 있을
수 있지만 홀로니 더 머물러 있기도 그렇다. 게다가 주인 아줌마는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시간은 17시) 하여 자리를 정리하여 차 계산을 하며, 핸드폰 충전에 고마움을 표하고 밖
으로 나온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될까? 어디긴 내가 있어야 될 아비규환의 속세지~~ 다시 지루한 일상으로 돌
아가야 된다는 생각에 잠시 눈앞에 어둠이 내린다. 허나 안갈 수는 없다. 그게 내 운명인 것을..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하며 늦가을 옥천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닫는다. 다음에 다시 인연
이 된다면 이때 못본 보장각 2층도 살펴보고 청련암 보리수(菩提樹)와 백련암, 연화산 정상까지
말끔히 둘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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