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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57(2018)년 12 월 17 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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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表忠寺 )


표충사(表忠寺 )

 

표충사의 원래 이름은 죽림사(竹林寺)였다. 서역승 황면(黃面 또는 黃髮)이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여 중창한 신라 고찰이다. 그러나, 표충사 하면 누구나가 쉽게 유정 사명대사를 떠올린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전후의 대외 외교에도 큰 몫을 한 호국승이다. 조정에서 그를 제향하는 사당(서원격)을 지어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하였고, 그 서원을 지키는 사찰을 표충사(寺)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원래 표충서원의 자리는 삼강동에 있었다. 나중에 지금의 자리에 있던 영정사(靈井寺)로 옮겨오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로 바뀌어졌다고 한다. 그 무렵 영정사는 거의 폐찰이나 다름없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현재의 표충사는 사명대사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표충사는 임진왜란의 영웅 사명대사를 기리는 절이다. 조정에서 표충서원(表忠書院)이란 사당을 지어 그의 업적을 치하하였고, 그 서원을 지키는 사찰이 표충사이다. 그러나 표충사의 원래 이름은 죽림사(竹林寺)였다. 서역승 황면(黃面 또는 黃髮)이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여 중창한 신라 고찰이다. 표충서원이 있던 자리도 지금과 달리 삼강동이었다. 나중에 폐찰이나 다름없던 영정사(靈井寺)로 옮겨오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로 바뀌어졌다. 널리 알려진 바와 달리 표충사는 사당명과 연고가 없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밀양이 고향인 사명대사는 법명이 유정(惟政)이고 당호가 사명당(四溟堂)이다. 사명당은 직지사 신묵화상을 찾아 출가하여 18세에는 봉은사에서 실시한 승과에 합격했다.
32세 때 직지사 주지로 있던 사명당은 금강산 보현사에 있던 서산대사를 찾아가 3년간 수행했다.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승병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한국불교의 법맥을 이은 학승이다. 43세 때 옥천산 상동암에서 하룻밤 소나기에 뜰에 핀 꽃이 다 떨어진 것을 보고 무상(無常)의 도리를 깨쳤다고 전언이다.

 

 

 

 사명대사는 표충사에 승군 훈련장인 규정소를 설치했다. 그는 평양성, 울산성 전투에 참전했고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와 3차례 회담해 명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배제하고 조약을 체결하려는 것을 막았다. 사명당은 또한 정유재란의 기미를 임금에게 알렸으며 정유재란 이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조선인 수천명을 송환했다.

 


 

 

사명대사가 입적하자 승군으로  참여했던 스님들과 밀양의 유림이 협력해 영조 때부터 270여년간 불교와 유교의례가 합친 향사(享祀)를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지내오고 있다. 유림이 불교를 핍박했던 조선에서 이것은 외례적인 행사였다.

 

 

 

 

표충사 대홍원전(大弘願殿) 앞에 세워진 3층석탑이다.
  탑 앞에는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등이 있으나
  이 곳은 탑과 석등이 놓였던 원래의 위치가 아닌 듯하다.
  표충사의 원래 이름은 죽림사(竹林寺)인데 신라 흥덕왕 4년(829)에 두번째로 크게 확장시켜
  이름을 영정사(靈井寺)로 고쳤다고 전한다.
  조선 헌종 5년(1839)에는 그때까지 밀양군 무안면에 있었던 표충사(表忠祠)를 영정사로 옮기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개칭하였고, 가람배치도 큰 이동이 있었던 것이니 이 탑도 그 때에 옮겨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기단(基壇)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각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탑신부(塔身部)는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기단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형태로, 균형면에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표면 모서리에는 매우 넓은 기둥이 새겨져 있고 다른 장식은 없다.
  2층 몸돌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급격히 줄었으며 3층도 체감되어 있다.
  또한 2·3층의 몸돌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으나 너비는 전체가 축소됨에 따라 좁아졌다.
  지붕돌은 밑에 4단의 받침이 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었으며,
  지붕은 아름다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다가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치켜올려져 있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얹혀져 있으나 정돈되지는 못하고,
  그 위에 1m 가량의 끝이 뾰족한 쇠막대를 세웠다.

  탑신부 1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커다란 단점이 있으나,
  기단이 1단으로 구성된 신라석탑양식을 따른 아담한 탑이다.
  탑의 머리장식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표충사 홈페이지에서

 

 

표충사내의 석등입니다.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 14호.
  방형으로 된 지대석과 원형으로 된 하대석이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일부가 부서진 상태이다.
  하대석은 낱장의 연꽃잎 모양 8매가 둘레에 고루 조각되어 있고,
  각형 1단의 받침으로 8각의 간주를 받치고 있다.
  간주에는 명문이나 조각이 전혀 없고 중대석에도 하대석처럼 낱장의 연꽃잎 모양 8매가 조각되어 있다.   화사석은 부등변의 8각형으로 4면에는 장방형의 화창구가있다.
  옥개석 추녀에는 낙수 흠이 있고, 옥개의 이면에는 8구의 희미한 안상이 있으며 화사석과 연결되어 있다.
  전각의 반전은 경쾌하며 옥개석 윗면 중심에 낱장의 연꽃이 모양 13매가 둘려져 있으며
  정상에 보주를 꽂도록 되어 있다.
  보주는 복발형 2단의 몰딩 받침위에 원좌를 두르고 그 위에 연봉오리 1개를 얹었는데,
  석등은 대체로 완형이지만 간주석, 화사석, 보주 등은 뒤에 보수된 흔적이 있다.
  조각의 특징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표충사 홈페이지에서

 

 

 

 

 

 

 

 

 대광전 옆에 나란히 자리잡은 팔상전은
  1854년(철종 5년)에 당시 주지였던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창건하였으며,
  1926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9년에 중창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위치는 현재 종무소가 있는 자리이고 지금의 위치에는 표충서원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부 승려들이 사찰 내에 유교식 서원의 존재가 불가할 뿐 아니라 대광전과
  나란히 사당을 둔다는 것은 불경(不敬)하다는 지적이 있어 1971년에 자리를 맞바꾼 것이었다.

  대광전과 마찬가지로 잘 다듬어진 장대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며
  내부에는 소조석가여래좌상만을 봉안되어 있다.
  팔상전은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사 홈페이지에서

 

 

 

 

  대광전은 표충사의 큰 법당이다.
 법당이란 진리로써 가득 채워져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법당에는 모든 번뇌와 미혹을 밝혀서 불멸의 생명, 무한한 행복과 영원한 자유를 이룬 부처님이 계신다.  스스로 이기심과 탐욕과 어리석음을 불러 일으켜서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눈 멀게 하는 중생을 향해
 무궁무진한 법문의 세계를 펼쳐 놓으신 곳이 바로 법당이다.
 대광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깊이 신봉 되어온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삼존불은 석가모니불(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형상화함),
 약사여래불(동방 유리광세계의 주인.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재화를 소멸하고 의복, 음식  등을 만족하게 하는 등의 12대 서원을 세운 부처님이며, 손에 약함을 들고 있음),
 아미타불(서방 극락세계를 주관하시며 그의 광명과 자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한 세계에까지 미  치며 그 광명을 받은 사람은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고 함)이며,
 이들 부처님은 중생의 염원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에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깊이 신봉되어 왔다.
 표충사의 대광전은 신라시대에 창건하였다고 하나, 화재나 병화(兵火)로 소실되어 중건, 중수 되었다.
 현재의 전각은 조선후기에 중건한 정면 5칸, 측면 3칸, 외3포, 내3포의 다포식 팔작지붕이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사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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